천국보다 성스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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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1. 08 - 2018. 12. 14
작가 : 김보영, 변영근
<천국보다 성스러운>은 전시공간이 제안한 다음의 가정, 설정을 모티브로 SF 소설가 김보영이 쓴 5편의 엽편 소설과, 소설을 토대로 일러스트레이터 변영근이 그린 10장의 그림으로 구성된다. -
장애, 병력, 나이, 출신국가, 출신민족, 인종, 피부색, 언어, 출신지역,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형태 및 가족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범죄전력, 보호처분, 학력, 사회적 신분, 그리고 성별, 성적 지향을 이유로 차별하지 않는 세상이 도래했다. 그렇게 모든 차별이 없어지자, 신이 천국에서 내려왔다. 자신이 창조주라는 것을, 초월적인 힘을 가진 것을 증명했다. 유대인의 신이고, 가톨릭의 신이고, 개신교의 신이고, 이슬람의 신이고, 그 밖의 신들의 원형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사람들의 궁금증에 답했다. 존재에 대한 의문이 풀리고, 인류는 진리를 깨달았다. 세상의 불평등은 신이 인류에게 내린 시련이었다. 인류가 시련을 극복하자 신은 그것을 축복하기 위해 강림한 것이다. 이제 세상은 천국이 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인류는 신이 생각한 진보의 끝보다 한 걸음 더 지나쳐 있었다. 신은 페미니스트가 아니었고, 인류의 다양한 성정체성을 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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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여성이고 동성애자인데, 제 인권을 반으로 자를 수 있습니까. 제 평등권을 반반으로 자를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왜 성평등 정책 안에 동성애자에 대한 성평등을 포함하지 못하시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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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대선. 문재인 후보가 페미니스트 대통령 선언을 하는 어떤 포럼에서 한 참석자가 외쳤다. 이는 문재인 후보가 기독교 단체와 만나 차별금지법 제정에 유보적인 입장을 밝힌 것에 대한 항변이었다. 문재인 후보는 나중에 말할 기회를 준다고 했고, 지지자들은 “나중에!”를 연호했다. 물론 문재인 후보와 지지자들이 말한 “나중에”는 포럼 말미를 말한 것이고, 실제로 문재인 후보는 포럼 말미에 그 참석자와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어쩌면 해프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중에”라는 말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마치 인권에도 순서가 있는 것처럼, 성평등은 지금 여기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1년 9개월, 나중이라고 할 만큼 적당한 시간이 지났다. 지금 여기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여전히 성폭력 피해자는 꽃뱀이 아님을 증명해야 하고, 연예인이 몰카로 협박당하면 어디서 볼 수 있냐는 댓글이 달리고, 동성 연인과 성관계를 가진 군인은 유죄를 선고받는다. 그리고 신의 이름으로 존재를 부정당한다. 나중에. 나중에. 나중에는 정말 모든 인권이 존중받는 성평등한 세상이 도래할까. 지금 여기에 만연한 혐오, 가부장 질서, 종교적 신념을 극복할 수 있을까. 지금 여기가 아닌 먼 미래의 시공간, 여성과 퀴어를 차별하지 않는 세상을 상상해본다. 절대자 신이 여성과 퀴어를 부정하더라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 완전한 성평등을 성취한 그런 나중에 대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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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보영은 자신의 이야기에 맞게 가정, 설정을 다소 바꿨고, “하늘에서 신이 내려왔습니다. 그 신은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5편의 엽편을 썼다. 그 문장을 기반으로 각기 다른 시공간을 배경으로 상상을 펼쳤다.